협곡의 사태
해구 어깨

협곡의 사태

수심 8,000미터에서 9,000미터에 이르는 해구의 어깨부에서, 퇴적물 사태가 급경사 암벽 사이의 좁은 수로를 따라 쏟아지고 있다. 거대한 단층 절벽에서 찢겨 나온 퇴적물 층리가 벽면을 따라 흘러내리고, 짙은 흑회색 구름처럼 응집된 슬럼프의 선단부가 각진 탈루스 암괴와 노출된 기반암 벤치를 삼키며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압력이 약 80~90메가파스칼에 달하는 이 영구 무광층의 심연에서는 햇빛의 흔적조차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부유하는 생물들이 뿜어내는 희미한 청록색과 청녹색의 생물발광 점들만이 칠흑 같은 수중에 드문드문 박혀 있다가, 밀려드는 퇴적물 연무에 잠시 덮여 꺼지곤 한다. 창백한 하달 달팽이고기 한 마리가 소란스러운 혼탁류 바로 위를 맴돌고, 단각류 무리는 진흙의 흐름이 닿지 않는 가장자리에 모여들다가 접근하는 퇴적물 전선에 흩어지며, 보호된 선반 위의 이매포아 유공충들은 주류를 피해 제자리를 지킨다. 해양설이 미세 실트의 얇은 베일과 뒤섞여 냉수 속을 자유롭게 표류하는 이 세계는, 어떤 목격자도 없이 오직 지구 자신의 힘으로 이 순간에도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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