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몰 흉터 원형극장
대륙사면

함몰 흉터 원형극장

수심 620미터, 대륙사면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초승달 형태의 함몰 절벽이 차갑고 고요한 물속에 우뚝 솟아 있다. 과거 대규모 사면 붕괴가 남긴 이 원형극장식 지형은 압축된 퇴적물과 균열된 이암이 호상(弧狀)으로 노출된 창백한 내부 지층을 드러내며, 선반처럼 돌출된 단구와 신선한 단애면이 퇴적물로 뒤덮인 분지로 이어진다. 약 51기압에 달하는 극한의 수압 아래, 절벽 기슭에는 무너진 각진 암괴들이 흩어져 있고 그 위로 얇은 실트 장막이 드리워져 있으며, 해저 가까이에는 희뿌연 저탁층 안개가 조용히 감돌고 있다. 멀리 위에서 내려오는 실낱같은 잔광이 단색의 짙은 청색으로 물기둥을 물들이는 가운데, 홀로 정지한 듯 떠 있는 그레나디어 한 마리가 은회색 실루엣으로 분지 바닥 위를 맴돌고, 투명한 새우 몇 마리가 암반 모서리에 조용히 달라붙어 있다. 어둠 속 주변부에서는 플랑크톤과 젤라틴질 생물들이 뿜어내는 미세한 생물발광의 점들이 먼 별처럼 명멸하며, 인간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이 세계가 오로지 그 자신의 법칙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말없이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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