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불꽃의 흔적
케르마데크 해구

차가운 불꽃의 흔적

케르마덱 해구의 축 위, 수심 수천 미터의 수괴 속에서 빛이란 오직 생명 자체가 만들어내는 것뿐이다. 태양은 이곳에 닿지 않으며, 600기압을 훌쩍 넘는 정수압이 물 분자 하나하나를 짓누르는 이 공간에서, 작은 부유 생물들이 청색과 청록색의 가느다란 생물발광 궤적을 짧게 남기고는 즉시 어둠 속으로 지워버린다. 유기물의 눈인 해양설(marine snow)이 해류에 실려 수직의 암흑 속을 느리게 강하하며, 퇴적물로 이루어진 희미한 해저면은 저 아래 까마득한 탄색 윤곽으로만 암시될 뿐 결코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태평양판이 오스트레일리아판 아래로 침강하며 만들어낸 이 좁고 기다란 구조적 함몰부는 주변 심해저평원보다 유기물이 집중되는 깔때기 역할을 하여, *Hirondellea gigas*와 같은 초대형 단각류와 반투명한 핵심수어류 같은 하달층 특유의 생물들이 극한의 압력과 1~2°C의 냉수 속에서 아무런 목격자 없이 살아간다. 이 세계는 인간의 부재와 무관하게 언제나 그러했듯 조용하고 완전하며, 오직 스스로 빛나는 생명의 단편들만이 절대적 어둠에 짧은 서명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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